'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3.28 현대 공리주의 이론가~ 피터싱어, 물에 빠진 아이구하기

저자는 책을 크게 4부분으로 나누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1부에서 가난에 빠진 세계를 돌보라는 큰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자선이 아니라 의무였던 시대가 있음을 도입하며, 기부란 못가진자의 권리차원이며, 가진자의 의무차원이라는 말을 한다. 여기 이 책에 나오는 글의 상당부분이 인상적이지만 그 중에 인상적인 몇 가지 문장들이 있다. 살아남기 위해 갖는 물건은 필

요에 의한 소유물이 아니라는 문장이 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박애는 풍요로운 타인의 도움을 요구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말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여러 나라들의 예를 들어가면서 기부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그 중 유대교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삶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시사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그런 인식과 환경이 다름을 크게 느꼈다. 저자는 자국 사람들이 기부를 거절할 때 내세우는 10가지 논리를 주장한

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자신들의 신념을 운운하고, 자신이 정당하게 번 돈이니 자신의 돈을 마음대로 쓸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자유주의 사상을 토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미국은 이미 대외원조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무조건적인 기부같은, 박애적 평등은 현실의 정치개혁을 저해함을 주장하고, 돈이나 식량을 공짜로 주는 기부는 의존하는 습관을 들이기 때문에 자활도가 없음을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씨앗, 근본인 돈을

기부한다면 자신들의 미래의 성장의 가치를 버리는 꼴이기 때문에 기부를 거부하고, 가진 것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림을 주장하고, 자신의 가족과 지역사회 국가는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챙겨야 하기 때문에 기부를 보류한다고 주장하고, 마음이 움직이기엔 너무 멀리 있는 사람들임을 주장하며 기부를 거부하는 행태를 비판한다.

이어서 2부에서는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이 기부를 거부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몇 가지 있음을 주장하고 기부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기부를 거부하는 첫 번째로 실험을 통해 ‘인식가능 희생자 효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통상적인 구호의 법칙으로서, 통계적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닌, 우리 눈에 보이는 희생자를 구하는 것이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추상적인 정보가 아닌 구체적 인식 작용이 일어날 때 더 크게 움직이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런 인식작용이 가능한 것은 감성체계, 숙고체계가 있기 때문인데 감성체계는 즉각적 행동을 유발하며, 숙고체계는 이성적 사고를 동반한다. 그런데 이런 숙고체계는 감성체계보다 처리시간이 길기 때문에 즉각적 행동에서는 표출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미지와 서시를 동반한 숙고체계는 큰 기부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에 기부를 장려할 때 이런

방식으로 하면 효과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로 그들보다 우리가 먼저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들은 수백만년동안 진화를 거듭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고로 남을 도와야 한다는 직관은 단지 동포를 도울 때까지만 뻗치는 것이 보통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망원경인류애라고 하는 이 말은 전세계를 통틀어
지구촌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현대시대에 맞지 않는 논리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헛수고는 하지 않는 다는 의식에, 난민을 구할 수 있는 수보다 비율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이유 때문에 기부를 거부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천명중 20%보다 백명중 80%를 구하는 일에 나서고자 한다며, 수치상 따지자면 200명

과 80명이지만 전자보다는 비율이 꽉 찬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논리에 대해서 비판한다. 기부는 무익성이라는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바다에 돌 던지기와 같다고 생각하는 행태가 기부를 거부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보면서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내 경험을 굳이 이야기하자면 난 초,중,고 시절 가난이란 것에

대해서 찌들면서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때 당시 친한 친구중에 잘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중학교때 아버지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말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내 친구의 아버지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면서 물질적인 도움을 거절했다는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물론 여기서 지금 내가 언급하는 형태는 이 책에서도 나온 것처럼, 전

형적인 안 좋은 기부의 방법 중의 하나이지만 말이다. 네 번째로 책임이 불분명하다면 사람들은 나서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키티 제노비즈라는 말이 도시인이 그 이웃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나타내는 용어처럼 통용되고 있다. 주변에 38명이라는 이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무관심으로 인해 폭행당하여 죽은 사례가 있음을 이야기한

다. 그러면서 그것을 방관자효과라고 이야기한다. 다섯 번째로 왜 나만 도와야 하는가? 라는 공정성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 기부에 방해가 됨을 이야기한다.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공정한 제안을 함으로써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기에 불공정한 제안을 받음으로써 이를 거절함으로써, 부당한 대접은 감수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그런 직관은

사회적으로 유용함을 이야기한다. 서로 믿고 협력관계를 믿는, 공정한 관계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여섯 번째로 결국 문제를 돈으로 귀결됨을 이야기한다. 칼 마르크스는 분리의 보편적인 기제가 돈임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돈으로 사람들의 성격, 힘을, 다른 무언가로 바꾸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돈 자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과 돈에 대해서 인색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돈은 개인주의를 복돋우는 한편 공동체의 인식을 희박하게 만드는 그런 사태가 오늘날 사람들의 주류인식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바람직한 기부문화를 정착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까에 대해서 고민한다. 기부문화는 기부하는 사람의 의도가 어찌되었던 간에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게 하라는 성서와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한다. 그

런 행동을 통해 결국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부를 권장하게 되고, 이는 더 큰 기부를 창출한다고 이야기한다. 기부의 의도가 ‘순수함’보단 기부의 용도가 ‘순수함’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돕게 될 대상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하는 것이 기부를 조금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줌을 이야기한다. 또
디폴트를 이용해 보다 많은 기부를 이끌어내야 함을 주장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장기기증을 예로 들면서 선택의 자유는 보장하고, 단지 디폴트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법이 좋은 방법임을 이야기한다. 단지 디폴트의 범위규정이 어렵기 때문에 이를 신중히 해야함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 기부도 자기만족이기 때문에

자기 이익의 원칙을 널리 받아들일 것을 이야기한다. 투표, 헌혈, 팁을 주는 행위와 같은 모든 행동들이 자기이익원칙의 이데올로기적 신념임에 기부를 할 때 이런 것 들을 이용하여 기부를 시작하면 좋은 효과가 나타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3부에서는 남을 돕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들은 기부를 하기 전 여러 가지 고민을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단체에 기부를 할 것인가? 한 사람을 구하는데 얼마나 비용이 들 것인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자선단체 같은 경우는 기부금액의 77%를 재단의 운영비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음을 이야기하며 대부분의 자선단체가 기부금의 효율성, 투명성 부문에서의 엄격한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비판한다. 그리고 한 사람을 구하는데 얼마나 들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들이 흔히 보는 광고들, 예를 들어 “아프리카 굶주리는 아이들20

명치 한끼 식사를 1000원이면 제공할 수 있다와 같은 광고들 , 하지만 이런 광고들은 실제로 이런 수치로 그들의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광고를 하는 것에 비판을 가한다. 실제 조사에 들어가 보니 대다수 단체들이 제시한 수치에서 2배정도에서 많게는 4배 이상의 수치가 차이가 남을 이야기하였다. 물론 그 중에서 효과적인

자선단체들도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서 저자는 그라민은행의 성공사례를 예로 들면서, 그같은 소액금융대출이 빈곤의 퇴치에도 아주 크게 기여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임을 이야기한다. 또 전 세계 금융기관들이 롤 모델로 하려는 이상적인 형태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무보증에 일반금융권 같으면 대출자격이 없는 사람

들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대출회수율이 97~98%에 달하는 경이적인 수치를 보여주면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이상적인 형태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여러 구호 단체들의 성공사례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프리카같은 나라에서 한 마을에 1만달러를 기부하여 우물을 만드는 사업을 예로 든다. 이것은 주민들 한명 한명에게 돌아가는 금액으로 친다

면 고작 10달러정도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다. 하지만 이렇게 우물을 지음으로써 물을 구하러 가는 시간을 단축하고 소비하지 않으며 그 시간에 공부라던지 다른 생산적인 일에 유용하게 씀으로써 큰 효과를 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굳이 따져서, 계산하여 수치를 낸다고 하여도, 이들 각자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가진 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객관적으로 금액이 많던 적던간에 이 돈을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세계에서 부유국들의 원조액은 실로 상당함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을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100달러 대비 0.3%,즉 30센트밖에 안 되는 수치임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런 원조들이 세계적 빈곤문제 해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 해결에도 쓰인다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OECD 원조액 전체의 1/4정도만이 세계 최빈국에게 가며

대부분의 국가들이 원조를 할 때 그들의 목적에 맞추어 한다는 것에 대해 열변을 토로한다. 무조건적인 원조가 악영향을 끼쳤던 사례들이 있음에 무조건적인 원조가 나쁠 수도, 또는 무조건적인 원조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적 자립도

를 높인 사례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이에 나쁜 제도가 좋은 사업을 몰아낸다면서 , 정부가 부패하고, 이 무능한 정부를 교체하면 기회가 생긴다며 무능한 정부가 있을시 역효과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기도 한다.

현재 지구는 만원이라며 인구 수용능력이 오버했음을 강조해 최빈국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론들이 있다. 이 이론들은 생산되는 식량속도가 인구증가 속도에 못 미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이 식

량들이 온전히 식자재로 소비되지 않고 다른 분야에 소비되고 있음을 간과하는 주장이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이로 인해 세계의 식자재들의 가격은 상승하고, 식량이 부족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4부에서는 기부의 새로운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에 대한 의무를 우선시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음을 이야기하며 부모가 자신의 아이와 도덕적 의무사이에서 갈등할 때 반드시 자신의 아이를 챙겨야 한다는 당위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격미달의 부모도 아니며, 단지 그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관점에서 선택을 할 때 남들과는 조금 다른 남다른 고민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에겐 누구나 이상적인 부모가 되는것과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생각을 실천하는 일 사이에는 절실하고 타협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함을 주장한다.

저자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제 몫을 내놓지 않는다 하는 것은, 사실 분명한데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내 생활을 망칠정도로 더 많은 몫을 부담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이런 부분을 위해서 공동적으로 행동하자는 운동을 주장한다고 한다. 새천년개발운동이란 것으로서, 빈곤비율인구를 절반으로 줄이고, 초등교육과 성교육의 차별을 없애고,
5세 이하 아동사망률과 산모사망률을 낮추고, 에이즈의 확산을 막으며, 음용수의 접근성을 높이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활동 실현에 있어 기부액책정을 슬라이딩스케일제도라는 것의 적용을 통한 차등기부문화가 발전,필요함을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각자가 질 수 있는 의무의 적정선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그런 이론들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빌게이츠와 같이 288억달러라는 유례없는 기부액을 기부한 사람들이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은 다른 백만장자들처럼 기부액이 상당히 낮은 수치에 머물면서 자신을 위해 초호화 요트, 항공모함 등을 소유하고 스포츠팀 운영 등

을 하는 그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며, 그런 행태가 우리시대의 문화를 대변한다며 씁쓸한 비판을 가한다. 아직 기부의 공식적인 기준은 없다. 하지만 많은 단체들에서 기부의 공식적인 기준을 세우려 노력하고 있으며 현실을 반영한 이

상적인 기부형태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런 것을 실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진세를 통한 차등적용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다가가느냐. 우리가 사는 사회의 제도적 구조와 사회적 관습이 가장 큰 관건이니 우리가 먼저 구조와 관점, 관습을 바꾸어서 행동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기부의 가장 큰 동기는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얻는 행복감이라고 이야기한다. 에피쿠로스라면 우리는 흔히 쾌락주의, 그래서 에피큐리안이란 말이 맛있는 음식, 술을 즐기는 사람을 지칭한다. 하지만 고대의 의미를
의식있게, 고귀하게, 정의롭게 살지 않는 한 기본삶은 누릴 수 없다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철학자도 있다고 한다. 그런 고대의 지혜는 지금도 의미가 있으며, 기부를 하는 사람의 절반에 가까운 비율이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기부와 행복 사이의 연계는 뚜렷하다며 행복하다는 감정은 실험을 통한 작용임이 밝혀졌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윤리적 문제를 다룬 책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기부라는 주제를 가지고 책을 다룰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책의 처음부분을 읽어 보면 저자는 이 책을 기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부여하려고 지은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마도 양심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책을

보고 조금의 죄책감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평소에 기부라는 것에 마음속에 관심이 조금은 있다. 하지만 막상 실천이라는 것이 잘 안 된다. 예전에 광고중에 그런 광고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정확히 맞는 줄은 잘은 모르겠지만 그 광고는 기부문화를 조성하자는 공익광고는 아니고 기업을 홍보하는 광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

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광고의 전반부에 사람들 모두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움을 주고 싶다는 공통된 의견을 낸다. 하지만 후반부에는 그런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꼬집어낸 풍자성 광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그 광고가 생각이 났

다. 저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하진 않지만 사람들은 자기합리화를 통해 기부를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운운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돈 쓸 권리를 주장하며 기부를 거부하는 우리 인간들의 행태가 참으로 위선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사회적 자본의 여건이 없다

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공부, 노동)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바보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극도로 가난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충분히 사회적 자본의 혜택을 누리고 부족함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너무나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사회에선 그 격차는
더욱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입신양명과 같은 말은 이제 옛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현대사회의 자본과 정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극빈층은 더욱더 극빈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부라는 것이 급변하는 이 세계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현재 세계의 부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부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나, 경영자들이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같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축복이 되어야 할 자원을 착취해 감으로써 이것들이 오히려 그들에게 부패, 쿠데타, 내전을 일으키는 저주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

글귀를 보면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과 비슷한 맥락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관객들이 내전과 다이아몬드라는 조금은 맞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에 대해서 연관지어 볼 수 있는..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잔혹한 현실에 대해서 조금은 윤리

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 부분과 연관지어보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부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논리가 떠올랐다.

이 책의 후반부를 보게 되면 기부의 가장 큰 동기는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얻는 행복감이라고 나와 있다. 나 역시도 기부를 많이는 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가끔 하기는 한다. 그리고 나는 금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에 헌혈이라는 기부로 내 의무를 다한다는 자기만족적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도 그래서인지 나는 돈을 기부하는 횟수가 헌혈을 하는

횟수보다 적다. 그런 것이 저자가 말한 자기행복감이라는 표현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의 한 문장인 ‘남들을 위해 자신이 사는 곳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일이리라 생각하고 내가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동기부여가 세상에 아마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에 문득 기부란 정치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16대 대통령인 故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의 인간적인 면도 포함이 되겠지만, 그의 전반적인 신념과 사상 때문이지 않나 싶다. 또 노무현 대통령은 내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라는 분야에 대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해 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

자가 주장하는 기부의 본질적인 의미와, 누군가가 생각하는, 그리고 또 내가 생각하는 정치의 본질적인 의미가 서로 맞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며 이 글을 마친다.

Posted by 전방
,